[2기 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 ③13살 아이는 왜 ‘납치’됐나

조나리 기자 승인 2021.03.12 11:44 | 최종 수정 2021.03.12 11:57 의견 0

선감학원과 삼청교육대 피해자인 한일영 씨는 "진정한 명예회복은 전 국민들이 다시는 '삼청교육대 부활'과 같은 소리가 안 나오게끔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취재룸J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더욱이 10대와 20대 초반의 나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들도 결코 아니었다. 부산에 형제복지원이 있었다면, 경기도에는 선감학원이 있었다. 한일영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길거리에서 경찰에 잡혀 선감학원에 수용됐다. 그는 부랑아도 아니었고, 학교도 다니고 있었다. ‘할당량’에 눈이 먼 경찰이 13살 아이를 납치한 셈이다.

한 씨가 목숨을 걸고 선감학원을 탈출했을 때 나이는 18살.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이 실종되자 부모 역시 온전히 살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을 떠나 친척집을 찾아간 한 씨는 그제야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씨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20대를 맞이한 그는 그나마 좋은 이웃들을 만나 취직도 하게 됐다.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뚝섬유원지에 다녀오라고 했다. 나름 성인이 된 한 씨가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 것. 그는 ‘동네 꼬마’들을 데리고 뚝섬유원지에 갔다가 또 다시 지옥을 겪었다.

운명의 장난일까. 이번에도 경찰이었다. 경찰은 난데없이 한 씨를 잡아다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도 죽다가 살아났다. 어느덧 60대가 된 한 씨는 선감학원 국가폭력 아동피해자 협의회 홍보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당시 국가가 자행한 인권침해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선감학원 운영·관리했던 공무원들, 모두 조사해야”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시설로, 광복 이후 경기도로 관할이 이관됐다. 일제강점기의 선감학원(당시 감화원)은 어린 소년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시설이었다. 실제로 일반 학교와 같은 수업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후 경기도로 이관된 후부터는 ‘부랑아 보호’라는 목적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실상은 보호가 아닌 강제노역과 학대를 일삼는 아동 인권침해 시설 그 자체였다. 경기연구원 조사 결과 피해자의 98.9%가 수용 기간 노동을 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노동시간은 ‘하루 평균 10시간’을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가혹행위 중에는 외부와의 단절과 심한 추위·더위 속에서 생활을 경험한 비율이 88.9%로 가장 높았다. 이어 ▲강제노역 86.7% ▲비위생적 생활 77.8% ▲진료금지 64.4% ▲수면금지 62.2% ▲화장실 사용 금지 57.8% 등이 뒤따랐다. 1982년까지 운영된 선감학원은 원아대장에 나온 수용인원만 4,691명에 달한다.

한일영 홍보위원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찰에 잡혀서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넘겨졌다. 그곳의 선생님들이 ‘곧 집에 보내주겠다’고 해놓고 선감학원으로 보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경찰에 할당량이 있었다고 하더라. 삼청교육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인원 채우기에 급급해서 웬만한 아이들 다 잡아다가 수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금 상식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때는 그랬다”고 씁쓸해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도 가장 억울한 것은 서울시립아동보호소나 선감학원에 들어갈 때 원아대장을 쓰는데 거기에 가평 주소와 다니고 있는 학교 이름, 부모님 이름을 다 썼다”면서 “그러면 학교에 전화만 한통 해서 다니고 있는 아이인지 확인만 하면 되지 않은가. 그런 것조차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선감학원 강제수용 피해 아동들 모습.

그 역시 선감학원에서 안 해본 농사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선감학원은 공무원들이 운영하고 관리했다. 그럼에도 아이들 집에 보내줄 생각은 안하고 오로지 일꾼으로 부려먹을 생각만 했다”면서 “애들 동원해서 농사 짓게 하고, 별의별 농사를 다했는데 정작 우리는 수확한 거 먹어본 적도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일영 홍보위원장은 당시 수용 아동들이 농사해 얻은 수확물의 출처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린애들 노동시켜서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알고 싶다”면서 “우리들한테는 썩은 음식만 주고, 그런 것들도 다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원지에서 삼청교육대로... 끝나지 않은 국가폭력

18살, 목숨을 건 탈출이 시작됐다. 하지만 돌아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홍보위원장은 “집안이 다 풍비박산 되고 다들 제가 죽은지 알았다고 하더라”라며 “다시 친척집을 찾아가서야 떨어져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한 씨는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못해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이웃들의 도움을 통해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김밥 싸주고 애들 보호자 역할을 하라고 하길래 뚝섬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잡혔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성동경찰서로 갔다. 다른 데서는 분리 심사도 있었다는데 거기는 그런 것도 없었다. 이틀인가 있다가 5사단 연병장에 내려다 놓고 그때부터 시작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8월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 군부대에 설치한 기관이다. 6개월 운영 동안 총 6만755명이 체포됐고 학생과 여성도 각각 980명, 319명이나 포함됐다. 교육은 무분별한 구타와 가혹한 육체훈련이 주를 이뤘다. 2~4주 훈련 후 일부는 복귀 조치됐으나, 일부는 6개월 간 노역에 처해졌다. 1988년 국정감사 당시 국방부는 교육 대상자 중 5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한일영 씨는 21살 무렵,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사진=대한뉴스

한 홍보위원장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 100여명 되는 사람들이 중학생부터 60세 넘어가신 분까지 있었다”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시작하더라. 그때까지 군인이라고 하면 어릴 때 위문편지 쓰고 좋은 이미지만 있었는데 아무 죄도 없는데 두들겨 패니까...”라며 당시의 충격적인 기억을 떠올렸다.

“왜 때리느냐”고 물었던 한 위원장에 돌아온 것은 더 가혹한 구타와 육체훈련이었다. 이 때문일까. 한 위원장은 추가로 6개월 노역이 부과됐다. 근로봉사대에서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던 그는 결국 선감학원을 탈출했듯이 그곳을 탈출했다.

한 위원장은 “맞아죽게 생겼더라고 보니까. 그러다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희망이 없다보니까 집에만 가자고 생각했다”며 “탈출해서 기차를 탔는데 갑자기 가던 기차가 멈추더라. 방송에서 나오는 말이 ‘군부대 사정으로 잠시 멈춘다’고 하더라”라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당시 한 위원장은 급히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헌병대 발소리가 점점 화장실 가까이 들렸다.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랐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발각되고 말았다.

“당장에 숨을 때라고는 화장실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헌병이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화장실이더라고요. 내 허리춤을 잡더니 ‘니가 한일영이지?’ 하더라고요.”

“삼청교육대 잘 만들었다? 언론도 책임 있어”

탈출은 실패로 끝났다. 또 다시 근로봉사대로 끌려가 구타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뿐이었다.

그는 “거기 가서 죽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자하는 생각이 드는데 혀를 깨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면서 “혀를 내 있는 힘껏 깨물었다. 피는 줄줄 나는데 죽지는 않더라. 그대로 현병대에 보내졌다가 의정부 지검으로 이송됐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검사하고 헌병들하고 얘기하는데 검사가 ‘민간인인데 뭔가 죄명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군대서 알아서 해라’라고 하더라”면서 “바로 다시 육군단으로 갔고, 두어 달 후에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죄명은 탈출로 인한 계엄법 위반. 징역 1역 꼬박 살고 나왔다”고 말했다. 한 위원장은 이에 대해 지난해 5월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삼청교육대라는 꼬리표는 줄곧 한 위원장을 따라다녔다. 경찰은 한 위원장이 사회로 복귀한 후에도 감시를 지속했다. 당시 치안본부는 삼청교육대 기록을 전산화하고 범죄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경찰들이 나왔다. 집에도 찾아오고, 한 달 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다 조사해갔다”며 “동네 사람들이 취직을 시켜주면 거기까지 쫓아왔다. 그러면서 사장한테 ‘삼청교육대 갔다 왔던 놈이니까 잘 감시해라’라고 한다. 당시에는 사장이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올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한 위원장은 언론에 대해서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삼청교육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언론이 심어줬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언론에서 전두환 나팔수 역할을 얼마나 했냐. 두어 달 동안 TV만 켜면 삼청교육 홍보가 나왔다”면서 “그러다보니까 어르신들 보면 ‘전두환 다른 건 몰라도 삼청교육대 잘 만들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게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당시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대상에 언론도 분명히 있다”면서 “과거에 대대적으로 삼청교육대를 홍보했듯이 대대적으로 결자해지 차원에서 삼청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제도인지 시청률 생각하지 말고 계속 보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진정한 명예회복은 전 국민들이, 특히 젊은 세대들이 다시는 ‘삼청교육대 부활’과 같은 소리가 안 나오게끔 해주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이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취재룸J 조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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